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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년 상상인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평
올해 당선작은 「사라진 시간」 외 4편이다. ‘사라진 시간’에 대한 그리움과 안타까움을 우울하지 않게, 일체 감상을 밀어낸 채 그려내고 있다. 지금 이 자리에 없는 소멸된 시간을 경쾌한 색채의 조명으로 비춰본다는 것은 그만큼 성숙한 의식을 보여준다고 도 할 수 있다. 뜨개질하는 데 하필이면 ‘빨간 스웨터’를 뜬다. 심지어 이승의 달력에는 없는 날짜인 ‘12월 34일’이 뜨개질을 하는 날짜다. ‘골목길’이 나오고 ‘웅덩이’가 생기고 개구리가 사는 스웨터다. 더 나아가 웅덩이가 얼면 썰매 타는 아이들이 생길 것을 짐작하며 이어진다. 그러나 모든 뜨개질이 그렇듯이 문득 올이 풀리고 ‘엄마’의 뜨개질은 멈추고 엄마는 사라진다. 그리고는 ‘알록달록한 골목길’이 나온다. 이 ‘알록달록한 시간’은 과연 안타깝다고 해야 할까 예쁘다고 해야 할까? ‘환타지’는 동심에 근본을 두고 있으며 시가 동심을 향할 때 가장 깊은 사유에 닿을 수 있다는 점을 이 시는 보여준다. 동봉한 일련의 시들이 비슷한 맥락을 가지고 전개된다는 점에서 이미 개성이라고 할 수 있다. 서양 말로 ‘스타일’이라고 할 만한 ‘자기 호흡’이 느껴진다는 점은 큰 장점이 아닐 수 없다. 축하드리며 제 호흡을 잘 살려서 오래 긴 호흡을 만드시기 바랍니다. 마지막까지 겨룬 작품은 「눈사람」 외 4편과 「낡은 의자의 독백」 외 4편이었다. 애써 단점들을 찾아내지 않았다면 충분히 당선될 만한 작품들이었음을 밝혀둔다. 체험적 삶을 시의 영역으로 형상화하는 일은 존재성을 드러내는 일이다. 작품의 무게와 깊이를 담보해 줄 수 있는 것은 경계를 확정 짓지 말고 너머의 것을 들여다보는 일이 아닐까 한다. 최종선에 들지 못했지만 ‘나’라는 존재의 성찰과 사회적 물음을 잘 드러낸 작품들이 많았다. 기성의 젊은 시인들의 어투가 그대로 보인다거나 사유를 손쉬운 공동체 의식으로만 드러낸 부분들은 조금 아쉬웠지만 새로운 시도들이 간간이 보였다. 지금은 미숙하지만 점점 더 힘이 세질 새로운 시도들을 즐겁게 기다린다.
본심 심사위원: 김종회(문학평론가) 장석남(시인)_글 예심위원 : 김분홍 정지우 나종훈 혜 원 ▶ 2025년 상상인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사라진 시간 외 4편
12월 34일 하루만 빨간 스웨터를 뜨자 세상이 잠시 멈춘 그 하루만 잊고 지낸 체온을
대바늘을 놀리면 꼬불한 골목길이 생기고 아이처럼 코가 풀리고 한 코가 빠져서 웅덩이가 생기지 웅덩이에 빠진 개구리 한 마리가 들락날락 스웨터에서 헤엄치지 개구리를 건지려고 대바늘 대신 손가락을 집어넣어 개구리를 찾느라 웅덩이가 커진
빨간 스웨터에서 초여름 내내 개구리 울음소리가 들리지 웅덩이에 나무를 심으면 스웨터에는 숲이 생길까? 웅덩이가 얼면 스웨터에서는 썰매 타는 아이들이 생기고
아이들이 스웨터 속으로 사라지는 12월 34일 하루만 스웨터를 뜨자
스웨터 뜨다 코가 풀리면 엄마는 스웨터를 풀었지 스웨터는 사라지고 빨간 털실 뭉치가 생겼지 도로 감은 털실 뭉치는 처음보다 더 커지는데 엄마는 왜 나를 감으며 작아졌을까? 길게 풀려나가는 빨간 털실을 따라 엄마가 사라지는
12월 34일 하루만 스웨터를 따뜻한 잔디밭에 앉아 빨간 스웨터를 뜨자
스웨터에서 웅덩이를 꺼내 잔디밭에 던지면 웅덩이에서 개구리가 나오고 웅덩이에서 엄마가 나온다 엄마는 다시 스웨터를 풀어 알록달록한 골목길을 만든다
다섯 개 골목의 성전
우리 장갑 속에서 살까? 살결이 포개진 그 안에서 먼 이웃도 두 번째 손가락처럼
실밥보다 오밀조밀한 나무의 가지들처럼 우리 장갑 속에서 살까?
풍경은 묻지 말고 창문이 없으니까 겨울은 창문이 없는 집이 제격이니까
추울수록 다정해지는 주머니를 열어도 따스함이 손금을 이어주니 빚 걱정도 없는 따스한 장갑 속에서 살까?
구름깃털 같은 집이지만 걱정하지 마 장갑을 끼면 튼튼한 집이 생기니까 다섯 개의 굴뚝이 있는
장갑 속에서 다 함께 살까?
흐물흐물한 사람들 불러서 보풀보다 일어설 힘없는 사람들도 불러서
금이 간 벽은 바늘로 꿰매고 구멍 난 장판은 단추를 달아서
이웃들이 단추를 예쁜 창문이라 부르는 장갑 속에서 살까? 문밖 개복숭아나무에 실밥이 대롱대롱 매달린 집에서
엉킨 실밥처럼 잠들까
복숭아 속에서 자라던 시간
내게는 풀리지 않은 의심이 있어요 당신이 익은 복숭아를 고집하면서 밤을 기다리는 수척한 모습을 떠올리면
의문이 피어요 꽃잎이 흔들려요
비를 넣고 바람을 불어넣으면 훅 감겨요 의혹의 열매가 마냥 커져요 신의 손끝이 닿았나봐요 복숭아 속에서 단백질이 자랐죠
당신과 복숭아가 함께 스칠 때면 따가운 목구멍에 그 단백질의 향이 번져왔어요
복숭아를 베어 물었는데 혀끝에 왜 슬픈 맛이 느껴질까요 내가 먹은 것이 버찌 맛이 아니라 복숭아 속의 애벌레였을지도 몰라요
난 몰랐어요 단백질에 대해서 그 애벌레가 버찌처럼 달콤함을 상속해 주는 일에 대해
밤을 기다리던 의문이 풀렸지요 그렇게 당신은 복숭아 속에서 단백질처럼 달콤한 생명을 길러주었죠
당신의 두 평 남짓한 정원에는 오늘도 애벌레가 꽃처럼 열리고 있어요
광장에서 쓰러진 동백꽃
비린내가 올라온다
이력서에 초라한 경력보다 화려한 병력을 적으라면
좋을 법도 한데
투석할 적마다 선홍빛 동백꽃 울컥울컥 화려하게 피었지
내세울 것 없는 이력 대신 붉은 이듬들이 먼저 길을 열던
이십 대를 지나
경력이라면 광장에서 광장으로 버스를 갈아타던 삼십 대와 사십 대를 지나
언제 투석을 멈추니 흔들린 생애를 무가로 삼아
쓰러진 꽃잎을 증명 삼아 엄동설한에 시작해 라일락 4월과 장미의 5월까지 울컥울컥,
선혈이 언제 멈추니 그 피 위에 아직 따뜻한 이름들이 서 있네 바람은 오늘도 붉은 동백의 목소리를 데리고 간다
불씨가 말하던 밤
네 오빠를 죽일 뻔했단다
뭐 훔쳐 먹었나? 카톡 카톡 소리를 딸꾹딸꾹 딸꾹질 소리로 들었던 그녀의 오래된 진실의 이야기가 카톡 소리에 서럽게 묻혔다
시어머니 몰래 먹었던 음식 때문에 딸꾹질을 하곤 했단다
그녀의 계속되는 산기로 인한 진통과 갑작스런 허기 몰래 먹었던 밥 몇 수저가 도둑 밥의 죄가 되어 계속 나오는 딸꾹질 그녀를 부엌에 가두어 버렸단다
부엌 아궁이 모서리에 기대어 허벅지 안쪽에서 아기 울음 같은 맥동이 일었고 딸꾹딸꾹 딸꾹질 소리와 함께 서서 낳은 아기 아궁이 속으로 굴러 들어가 버렸단다
불씨가 없길 다행이었던 아이의 울음소리가 불길을 대신해 타오르고 그날부터 딸꾹질 소리를 들으면 오래전 자신의 허기와 죄의 잔향이 느껴졌다
그 불씨가 내내 뜨거운지 어둡고 깊은 우물 속으로 그녀를 끌어당기던 그 아이의 손 숯처럼 검은 눈썹과 불처럼 뜨거운 마음을 건져낸 그녀
그런 유전자를 가진 아이 손주들 영상을 들여다보다가 난 카톡 소리가 딸꾹딸꾹 소리로 들리는 그 작은 단말음이 구덩이 속의 첫울음으로 되돌아가는 것 같고 그녀의 젖은 심장을 뜨겁게 데웠다
▶ 당선 소감
모래시계를 뒤집으며 기다린 봄
당선 소식 전화를 받았을 때, ‘설마’ 하는 마음에 한동안 숨을 고르기 바빴습니다. 이내 심사위원님의 목소리로 이어졌을 때야 비로소 당선이 실감 났습니다. 심하게 벅찬 감정이 전화기 너머로 들릴까 봐 서둘러 창문을 열었습니다. 차가운 겨울 공기 사이로 낯선 봄의 향기가 섞여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저에게 시는 늘 잡히지 않는 먼 곳의 안개 속 불빛 같았는데, 이제 그 불빛 향해 한 걸음 내디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문장들을 줍고 버리기를 반복했습니다. 남편이 사준 10분짜리 모래시계를 수없이 뒤집어도 한 문장도 못 쓰는 날들이 많았습니다. 시를 왜 쓰냐는 물음에 이제는 좀 편안하게 답하고 싶습니다. 말로 다할 수 없는 것들을 언어로 옮기고 싶다고, 쓰는 동안만큼은 내 안에 엄혹한 기억들이 잠시 편안한 자리를 얻는 것 같고, 또한 그것들을 공감하는 분들이 점점 많아질 것이라는 바람 때문입니다.
누구에게도 닿지 못할 혼잣말이 될까 두려웠던 제 문장들이 비로소 누군가의 눈에 가닿았다는 사실이 아직은 얼떨떨하고 벅차오릅니다. 이번 상상인신춘문예 당선은 제게 ‘그렇게 계속 써도 된다’는 조용한 허락처럼 느껴집니다. 상상인 관계자분들께 신춘문예의 당선인으로 기회를 주셔서 다시 한 번 심심한 감사의 표현을 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시를 끝까지 읽어주시고 귀하게 선택해 주신 심사위원 선생님들께 깊이 감사드립니다.
또한 묵묵히 제 글을 지켜봐 준 가족과 문우들 늘 격려해 준 친구들 그리고 저를 이끌어 주신 선생님께 고마운 마음 전합니다. 모래시계를 다시 뒤집듯, 멈추지 않고 쉽게 설명되지 않은 마음과, 이름 붙이기 어려운 순간들을 시로 남기는 성실하게 오래 쓰이는 시인이 되겠습니다. 김포 출생 캐나다 크리스천 컬리지 박사 졸업(상담·코칭과 전공) 리더십 강의와 상담·코칭 전문 활동 전)미8군 우체국 근무 김포문예대학 수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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