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진행 수 3,113

[소개] 정경이 시집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밤> -도서출판 상상인-

2025.11.25

 





정경이 시집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밤

  

상상인 시인선 093 | 2025년 11월 10일 발간 | 정가 12,000원 | 128*205 | 138쪽 

ISBN 979-11-7490-023-4(03810)
도서출판 상상인 | 등록번호 572-96-00959 | 등록일자 2019년 6월 25일 
(06621) 서울시 서초구 서초대로 74길 29, 904호 
Tel. 02 747 1367, 010 7371 1871 |Fax. 02 747 1877 | E-mail. ssaangin@hanmail.net

* 이 책은 전라남도, (재)전라남도문화재단의 후원을 받아 발간되었습니다.

[시집 소개]

우리는 대개 정면만을 응시한다. 밝게 빛나는 것, 선명한 윤곽, 또렷한 표정들. 그러나 정경이 시인은 다른 곳을 본다. 시집의 첫머리에 등장하는 “등은 뭉클하다”는 고백처럼, 그는 보이지 않는 뒷면을 더듬으며 시작한다. 얼굴 대신 등을, 화려함 대신 굴곡을, 말 대신 침묵을 따라가는 이 시선은 우리가 외면해 온 진실의 자리로 독자를 이끈다.

이 시집이 포착하는 세계는 거대한 서사가 아닌 미세한 떨림의 세계다. 이른 새벽 대문을 나서는 여인의 등허리, 설거지를 하며 구부정해진 허리, 툭 떨어지는 동백꽃의 순간. 시인은 이런 사소한 장면들 속에서 삶의 무게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길어 올린다. 특히 동백꽃이 “찬란하게 사랑하다/흐트러짐 없이/툭,” 떨어지는 장면은 화려한 생의 이면에 숨은 죽음을, 그리고 그 앞에서의 겸허한 기도를 하나의 이미지로 압축해 보여준다.
사랑에 대한 시인의 태도는 더욱 특별하다. 「간격」이라는 시는 제목 그대로 거리를 사랑의 본질로 제시한다. “네가 보고 싶을 때면/나는 바다로 간다”는 고백은 역설적이다. 그리운 사람에게 곧장 달려가는 대신 바다라는 매개를 거쳐 가는 이 우회야말로 진정한 사랑의 형식이라는 것. 너무 가까이 다가서면 서로를 상하게 하고, 멀리 떨어지면 관계가 소멸한다. 시인이 찾는 것은 바로 그 사이의 적정한 간격이다. “저만치 있는 그대/먼 곳에 있어 그리운”이라는 마지막 행은 물리적 거리가 오히려 정서적 깊이를 만든다는 역설을 아름답게 증명한다.
표제작 「하얀 나비」에서 이별의 예감은 절망이 아닌 준비의 시간으로 전환된다. 민속 신앙적 징조를 받아들이되 거기 매몰되지 않고, “이제 이별을 준비할 시간”이라는 담담한 문장으로 나아가는 화자의 태도는 성숙하다. 사랑의 끝을 미리 상정함으로써 현재를 더욱 또렷하게 붙잡는 이 역설적 전략은, 소유가 아닌 배려로서의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정주와 유랑 사이의 긴장도 흥미롭다. 「집」에서 화자는 누에와 제비가 온 힘을 다해 짓는 집을 부러워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정처 없이/집도 없이/떠돌”고 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이것은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떠돌아야만 감지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는 자각이다. 「그 섬의 허벅지가 곱다」에서 “붉은 닻을 빠뜨리고” 정박했던 섬의 발뒤꿈치에서 지느러미가 자라나는 장면은 이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머물렀기에 떠날 수 있고, 떠나보았기에 머무름의 의미를 안다. 정주와 유랑은 대립하지 않고 서로를 길러낸다.
이 시집의 문체적 특징은 절제와 여백에 있다. 시인은 감정을 직설하지 않고 쉼표 하나, 행간 하나로 독자의 상상을 자극한다. “어,/혼자가 아니었네”(「유달산 밤 벚꽃」)에서 “어,”라는 짧은 감탄사 하나가 화자의 내면 전체를 드러낸다. “맺힘”이나 “차마,” 같은 단어들은 그 자체로 응축된 감정의 폭발이다. 많이 말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깊이 울린다.

결국, 이 시집은 보이지 않는 것들을 보는 법을 가르친다. 햇빛이 마당을 뛰어다니는 평범한 날, 할머니가 장독대 뚜껑을 여는 일상의 순간에서 “바싹 마른 고추가 몸을 뒤집는” 작은 기적을 목격하는 일. 그것이 바로 희망이다. 정경이 시인은 거창한 약속 대신 미세한 변화를, 화려한 수사 대신 소박한 관찰을, 소유의 집착 대신 배려의 거리를 선택한다. 그리고 그 선택들이 모여 우리가 잊고 살았던 삶의 온기를 되살린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던 이 밤의 언어들이, 이제 한 권의 시집으로 우리 곁에 당도했다.


 

[시인의 말]

생의 반나절이 

씻김의 의식 안으로 들어왔다
씻겨나가는 것은 
눈물만이 아니었다
생의 경계에 선 노래.

혼돈의 바람은 
정화수처럼 맑아졌다
남은 이도, 떠난 이도
잠시 후련해진 밤,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밤.


2025년 11월 

정경이

 

 

[저자 약력]

정경이


1966년 전남 완도에서 태어나 목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동 대학원 국어교육과를 졸업했다. 2001년 전남일보 신춘문예에 ‘발자국은 길을 묻지 않는다’로 시부문 당선되어 등단했다. 시집으로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는 밤󰡕이 있다. 현재 한국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st14677@naver.com

 ​  

인기 순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