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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혜진의 첫 시집은 ‘사랑’의 불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끝없이 ‘사랑’을 상상하고 실천하고 꿈으로 각인해가는 불가항력의 과정을 담은 격정적 고백록이다. 그 세계는 때때로 실존적 비애나 결핍의 악몽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시인은 그 장막을 뚫고 자신만의 시적 진실을 하염없이 노래해간다. 가령 시인은 “당신이 없으면 숲은 파국”이라는 선언 속에서 2인칭을 애잔하게 부르면서 “말없이 오지로 떠난 이름”이자 “불빛에 비쳐 사라진 이름”인 “너의 기억을 모으는” 조향사調香士 역할에 진력하고 있다. 물론 그때 시인은 비로소 사랑이 “어디론가 흘러갔다 다른 이름으로 찾아오는” 순간을 경험하게 되고 “얼룩의 심장이 부풀어”오르는 존재증명의 정점에 서기도 한다. 그러니 그녀에게 ‘사랑’이란 오랜 시간 갇혀 있던 “너를 여는 순간”일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진혜진은 끊임없이 말의 장場을 확장해가면서 손쉬운 초속超俗의 포즈 대신 삶의 필연적 모순을 응시하는 모습을 택한다. 하나의 음색을 고집하지 않고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가장 선명한 울림의 목소리를 남겨간다. 이때 그녀의 몸과 마음은 ‘시’라는 질서 안으로 가지런히 모이기도 하고, ‘시’의 바깥으로 탈주하려는 욕망을 가지기도 한다. 이러한 이중 욕망이 그녀로 하여금 “불완전이란 속이 먼저 붉어지는 것”이라는 자각을 통해 “흩어지며 들리는 천상의 소리”를 수습해가는 예술적 자의식을 가지게끔 해준 것일 터이다. 비록 세계는 “빗물에도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존재하지만, 시인은 자신의 색깔과 소리와 온도로 그 얼룩을 안아들이면서 “상처를 타고 오르는/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하나 이후의 하나”임을 고백해가는 것이다. 이처럼 진혜진은 존재론적 성찰과 세계에 대한 탐색 과정을 아름답게 들려줌으로써 자신이 겪어온 삶의 페이소스를 독자적인 미학적 에너지로 전이시켜간다. 그러한 자기 개진을 통해 일면 존재의 시원始原으로 달려가기도 하고 일면 살아가면서 만난 사물들을 향한 호혜적 마음의 결을 치열하게 새겨가기도 한다. 시인은 자신만의 시적 표지標識를 통해 불가능한 사랑을 순간적으로 탈환하는가 하면 신명과 열정을 다해 자신의 언어를 예술적으로 승화해가기도 하는 것이다. 우리 시단에 나타난 진혜진만의 시적 모험이요, 뭇 타자들을 향한 따스한 말건넴의 아득한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그렇게 그녀의 시와 사랑은 “물을 따라 번지는 불”처럼 우리의 심장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 -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 국문과 교수) 진혜진의 시는 고루한 상식을 전복하고 낯선 이미지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시편들은 삶의 이면의 서사들을 다양한 형식으로 거느리고 있다. 시인은 화석화되거나 획일적 정보에 포섭되지 않은 미지에 이르고자 한다. 그는 인간의 관점에서 사물에게 폭력적으로 부여된 보편적 명칭이 사물이 본래 가지고 있는 유일성과 고유의 특성을 파괴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인지하고 있다. 그러므로 진혜진 시인은 언어를 지우고 그 자리에 벌거숭이 시간을 들여앉혀서 일반명사들을 무효화시키는 전복적 사유를 계속 이어갈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수단과 매개로서의 언어를 능란하게 부릴 줄 아는 진혜진 시인이 앞으로 수행해야 할 몫이기도 하다. -홍일표(시인) 해설에서 저자약력 ![]() 진혜진 2016년 경남신문, 광주일보 신춘문예, 제11회 시산맥작품상 수상. 시집 『포도에서 만납시다』
건너가는 말 나는 빗방울에 갇혀 있고 너라는 불완전한 언저리를 건드린다 우리는 어쩔 수 없는 하나 이후의 하나
시집 속의 시 한 편 너는 나로 나는 너로 감겼던 얼굴이 풀립니다 겹은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풀려야 할 것이 풀리지 않습니다 예전의 당신이 아니군요 풀린 것들에서 배웅의 냄새가 납니다 나는 얼굴을 감싸고 화장실을 다녀갑니다 내려야 할 물도 우주라 욕조에 몸을 띄웁니다 세면대의 관점에서 얼굴은 흐르는군요 얼룩의 심장이 부풀어 오릅니다 비누거품에서 맹세는 하얗다는 걸 보았습니다 이제 거울의 시간입니다 위험을 느끼는 것은 숨의 기억입니다 피를 흘립니다 문지르면 문지를수록 얼굴에는 새카만 통로가 생겨납니다 너의 손안에 나를 풀어놓고 얼룩을 통과해야 할 때입니다 나는 차례 1부 이방인들이 내 안에 얼룩무늬 두루마리 _ 019 빗방울 랩소디 _ 020 호수의 이불은 무거웠다 _ 022 점토인형 _ 024 검은 치마 _ 026 자하 _ 027 통화음이 길어질 때 _ 028 바그다드 _ 030 스테인드글라스 _ 032 복용법 _ 034 딸기오카리나 _ 036 데생 _ 038 앙상블 _ 040 발가락이 다른 발가락을 이해하기 시작하는데 _ 042 아니요 _ 044 2부 어떤 슬픔은 잘린 부위에서 어떤 슬픔은 잘린 부위에서 다시 자란다 _ 049 물을 따라 번지는 불의 장미 _ 050 1990년 _ 052 수상한 색맹 _ 054 풍경 이데아 _ 056 겹눈 _ 058 앵두나무 상영관 _ 060 야누스의 고해 _ 062 급발진 _ 064 믿음이 저 혼자 믿음을 찾아 _ 065 아나키즘 _ 066 카푸치노 _ 068 B203에는 장수하늘소가 산다 _ 069 조롱박 _ 070 터럭 _ 072 3부 누군가의 말이 흘러든다 적극적 빨강 _ 077 이분법 코코넛 _ 078 생겨나는 자물쇠 _ 080 니체의 망치 _ 081 의문 기울기 _ 082 분수 _ 084 조향사 _ 086 블랙홀 _ 087 서운이 닫히지 않는 _ 088 ON AIR _ 090 가벼운 계보 _ 092 드라이플라워 _ 094 잠 몽타주 _ 096 립스틱야자 _ 098 꽃잎지방紙榜 _ 100 4부 순간이 아홉보다 긴 물결일 때 바람개비 _ 105 그럼에도 나팔 _ 106 불량한 피아노 _ 108 나비의 탄생 _ 110 S. N. S _ 112 초속 30미터 벚꽃이 떨어지는 저녁 _ 114 홀로 시소 _ 116 먼지의 결혼식 _ 118 몽유 _ 120 9를 건너는 동안 _ 122 꽃이 극락을 물고 _ 124 매일 조금씩 자라는 아사녀 _ 125 해설 _ 홍일표 _ 127 신생의 감각과 미지의 언어 미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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